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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소!여가봤능교? 바로 이 맛 아잉교~! 니캉 내캉 같이 가보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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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참고=부산광역시 홈페이지 · 부산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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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지
부산시민공원
이기대
영도다리

근대사

100년만에 돌아오다 부산시민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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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침탈의 역사를 거쳐 59년간 미군 주둔 등 굴곡의 근대사를 상징하는 부산시민공원(옛 미 캠프 하야리아)이 2014년 4월 세계 최고 명품 도심공원으로의 재탄생 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명품테마공원'이란 주제로 금세기 최고의 공원 설계가인 1제임스 코너(미국)가 구상한 '기억·문화·즐거움·자연·참여'라는 5가지 주제의 숲길을 근간으로 각종 시설물을 배치했다. 부지의 역사성 보존 차원에서 장교관사 등 옛 미 캠프 하야리아 건물을 그대로 살려 공원 역사관과 문화 예술촌 등으로 재현했다.

부산시민공원은 부산진구 양정동, 연지동, 범전동 일원 53만㎡ 부지에 조성됐다. 2011년부터 3년 8개월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국비 3천439억원, 시비 3천240억5천700만원 등 6천679억5천700만원이 투입됐다.

공원 내에는 97종 85만여 그루(교목 은행나무등 46종 9,937 그루, 관목 43종 844,314 그루)의 나무가 심어졌으며 공원역사관, 공원안내소, 부전천(2.5㎞), 전포천(2.5㎞), 분수(4개소), 광장(6개소), 어린이놀이시설(9개소) 등과 주차장(902면), 카페(3개소), 편의점(2개소), 화장실(22개소) 등의 편의시설이 만들어졌다.

1 공원설계자 제임스 코너(James Corner)
: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조경전문이자 도시설계가

자료 참고=부산시민공원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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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피란시절의 추억... 슬픈 랜드마크 영도다리

1934년 개통된 부산의 명물 영도다리. 1966년 중단되었던 도개(跳開) 기능(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리기)이 2013년 11월 27일 47년 만에 복원되었다. 매일 한 차례 정오에 다리를 들고
내리는 시간 포함, 총 15분 동안 도개한다.

영도다리는 당시 대단한 볼거리였다. 하루 최대 7차례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는 광경을 보러 인파가 몰렸다. 영도구 문화해설사협의회 황동웅 회장은 "6·25 때 피란민이 다른 도시보다 부산으로 몰려든 건 영도다리 영향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영도다리는 당시 전국적으로 유명했죠. '헤어지면 영도다리에서 만나자' 가족들과 약속하고 피란길에 올랐던 겁니다."

이후 영도다리에는 피란민들과 함께 점바치(점술인)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점바치들은 피란민들의 ‘불안함과 간절한 사연을 들어줬고, 위로했으며, 희망을 안겨줬다’고 한다. '점(占)'을 내걸었으되 '미신'이 아닌 '희망'을 나누는 공간이 바로 이 부둣가였다는 것이다. 이 거리를 '영도다리 점집 골목'이라 불렀다.

영도다리는 1966년 도개(跳開) 기능을 멈추었다. 다리를 들었다 내리는 기계가 낡았고, 교통량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영도로 들어가는 수도관이 다리 위에 놓이면서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게 됐다. 2013년 11월 27일 도개 기능이 복원되는 건 다리 옆에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게 계기가 됐다. 임경모 부산시 도로계획과장은 "롯데건설이 영도다리 옆 시청 소유 땅을 구입해 107층 건물을 짓기로 하면서 늘어나는 교통량을 소화하기 위해 영도다리의 기존 4개 차로를 6차선으로 확장했다"며 "이 공사를 벌이면서 영도다리의 도개 기능도 재현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고 했다.

영도대교의역사

  • 1934.11
  • 1950
  • 1966
  • 2006
  • 2009
  • 2010
  • 2013
희망을 점지해준 그곳…영도대교 밑 '점집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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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부산 최고의 명품 산책길 이기대의 유래를 아시나요?

부산의 상징인 남구 용호동 오륙도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절경 중에 절경 ‘이기대(二妓臺)’가
나온다. 장산봉이 바다와 면해 기괴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 굽이굽이 돌 때마다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이기대라는 이름은 1850년 좌수사 이형하가 편찬한 ‘동래영지(東萊營誌)’에
기록됐는데, '두 기생(二妓)'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하여 이기대라고 부른다고 쓰여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수영성(水營城)을 함락시키고 경치가 빼어난 이 곳에서 축하연을 열고 있을
때 수영(水營)의 의로운 기녀가 왜장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끌어안고 바다로 투신하여 함께 죽은
곳으로서 이기대가 아니라 의기대(義妓臺)가 올바른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밖에
경상좌수사가 두 명의 기생을 데리고 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한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면 기암절경 사이로 바다가 나타난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광안대교와 해운대를
감상할 수 있고, 다른 관광지와 달리 상업적인
시설물이 없어 진짜 바다를 만나고 있다는
실감이 드는 곳이다. 일출과 일몰, 월출 모두
장.관으로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 유명하며
산책로와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인근
용호동 주민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해안산책로 걷기 코스 (거리 4.7km 구간)
섶자리
(이기대 입구)
나무데크 길 동생말 구름다리
구간
어울마당 치마바위 농바위 구리광산 공룡 발자국 오륙도 앞
광안리부터 해운대로 이어지는 해안가가
한눈에 잡히는 아름다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섶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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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동래성 전투이야기 동래읍성지

조선시대의 부산은 나라의 관문과 외교의 중심지로 부각된 시기이다.
이때 부산의 중심지는 동래로, 일본과 가까이 마주하고 있어서 국방의 기능이 중시되었고 동시에 교린외교의
창구였다. 동래 고을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 동래읍성이었고, 성 안에는 동래부 동헌을 비롯한 여러
관청들이 있었다. 현재 동래읍성은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호로 되어 있다.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동래읍성으로 진격해 "싸우려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한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끝내 항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 무장한 왜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임을 알고 송 부사는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네 번 절한 뒤 부모님에게 올릴 글을 부채에 쓴 후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다.

동래읍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의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옛 동래읍성은 1021년(고려 현종 12)에 왜구의 노략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지역인 현재의 부산지방병무청을 중심으로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 고쳐 쌓았던 성이다.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이 심해지자 동래읍성은 1387년에 현재의 동래시장 일대로 옮겨진 후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격전지이자 패전지가 되었지만 이 성을 방패삼아 항전하였던 유서 깊은 곳으로 1731년에는 이전보다 훨씬 크게 쌓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철거되었고, 그나마 동쪽부터 북쪽의 산등성이에는 성의 일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전해오다가 1979년부터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자료 참고=동래읍성 역사관, 사진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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