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이 사랑한 고양이조선시대 임금이 '집사'였다고?
조선의 제19대 임금, 숙종. 장희빈을 비롯한 여러 여인들과의 일화로 유명한
숙종도 사실은 ‘애묘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숙종은 금빛 고양이에게 손수 ‘금손’이란 이름을 지어주며,
항상 곁에 두고 쓰다듬으며 정사를 보았다고 한다.
금손이를 밥상 옆에 앉혀놓고 고기반찬을 손수 먹였다 전해지는데...
후궁의 처소에도 들르지 않고 금손에게 애정을 쏟았다고 하니
가히 한국사 최고위 ‘집사’라 할 수 있겠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고 식음을 전폐하던 금손이는 결국 숙종의 뒤를 따랐다. 숙종이 승하한지 13일째였다.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명릉 곁에 묻어줬다.
이익은 성호사설에 ‘고양이란 성질이 매우 사나운 것이므로, 비록 여러 해를 길들여 친하게 만들었다 해도, 하루아침만 제 비위에 틀리면 갑자기 주인도 아는 체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인데, 이 금묘 같은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다’고 적었다.
- 금묘야 부르면 금묘 곧 달려오니 사람 하는 말귀를 알아듣는 듯하였네
기린과 공작도 오히려 멀리했건만 금묘만 가까이서 선왕 모시고 밥 먹었네
낮에는 조용히 궁궐 섬돌에서 고양이 세수하고 차가운 밤에는 몸을 말고 용상 곁에서 잠들었네
비빈(妃嬪)들도 감히 고양이를 가까이하여 길들이지 못하는데
임금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며 고양이만 사랑하시었네
- - 김시민 <금묘가(金猫歌)> 中
‘궐냥이’들을 아낀 영조내 차마 고양이를 죽일 수가 없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고양이가 궁궐에 들어와 사고를 치는 기록들이
숙종실록 이후 영조실록까지 유독 많이 나타난다.
숙종의 고양이 사랑은 아들 영조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실록에는 궁궐 내에 있는 고양이를 아끼는 영조의 모습이 적혀있다고 한다.
팔에 통증이 온 영조. 어의에게 아프다고 말하자 어의는
“고양이 생가죽으로 찜질을 하면 낫는다”라고 일러주며
직접 시험해보기를 권했다.
이에 영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봐서 그런지 내 차마 고양이를 죽일 수가 없소!”
-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副提調) 유엄(柳儼)이 고양이 가죽이 팔 아픈데 이롭다고 하여
임금에게 시험해 보도록 청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내 일찍이 여러 마리의 고양이가 궁궐 담장 사이를 왕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차마 그 가죽으로 병을 치료하는 데 쓰지는 못하겠으니, 이 역시 포주(庖廚)를 멀리하는 마음이다.”
하였고, 여러 번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 영조 44권, 13년(1737 정사 / 청 건륭(乾隆) 2년) 5월 24일(신해) 1번째기사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상원사에 고양이상이
있는 이유?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의 사찰, 상원사 법당 입구의 돌계단 옆을 보면 고양이 모양의
석상 한 쌍이 있다. 여기에는 세조의 목숨을 구한 고양이 이야기가 얽혀 있다.
오대산에서 불치병을 고친 세조, 이듬해 다시 그 장소를 찾았다.
상원사에 당도한 세조는 곧바로 법당에서 예배를 올리고자 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뒤로 당기기 시작했다. 놀란 세조가 고양이를 쫓아냈지만,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고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마치 법당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 같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세조가 병사들을 시켜 법당 안을
샅샅이 살펴보도록 했다.
그리고 불단 밑에 숨어있는 한 자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었다. 궁궐로 돌아온 후에도 서울 근교 사찰에 묘전을 두고 고양이를 키웠으며,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 효종에게 혼난 숙명공주
"딸아, 너는 어째 시집가서도 고양이만 끌어 안고 있느냐!”
왕만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공주도 예외는 아니다.
2012년 방영했던 MBC 드라마 '마의'에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넷째 딸 숙휘공주가 나온다.
드라마에서 숙휘공주는 궁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애지중지 보살피고 감정 표현에 솔직한 천방지축 공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고양이를 좋아한 공주는 숙휘공주가 아니라 숙휘공주의 언니인 숙명공주라고.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사진 출처 : 국립청주박물관
17세기 왕실 한글편지를 보면 효종이 숙명 공주가 고양이를 안고 있다고 꾸중하는
내용이 있다. 이 편지는 숙명공주가 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집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에
실려 있으며 '숙명신한첩'은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시집을 가서도 늘 고양이만 끼고 사는 공주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편지 내용은 이렇다.
- “너는 시집에 가 (정성을)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찌 고양이는 품고 있느냐?
행여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하여 먹어라”
-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 中
고양이 덕에 사약을 피한 박상 신통한 고양이 내비게이션
한양으로 가던 중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였다.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는
바짓가랑이를 물고 잡아당겨 숲으로 향했다.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 눌재 박상 선생. 그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희대의 폭군 연산군 때에도 박상 선생은 왕의 폭정을 겁내지 않고 바른 말만 했다.
이런 행동은 연산군을 노하게 만들었고, 연산군은 박상 선생을 사형하라 명했다.
곧바로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전라도로 출발했다.
한편 박상 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 당당하게 처벌을 받을 것을 결심했다.
한양으로 가던 중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였다.
난데없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는 바짓가랑이를
물고 잡아당겨
숲으로 향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박상 선생은
고양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가 고양이를 따라 숲 속에 있는 동안, 사약을 가지고 오던 금부도사는
박상 선생을 보지 못하고 갈림길을 지나치게 됐고, 이 덕분에 그는 목숨을 구했다.
박상 선생은 이 일로 자신을 구한 고양이를 위해 논 수십 두락을 샀다.
해마다 논에서 나온 곡식을 절로 보내 고양이들을 먹이도록 했다.
박상이 고양이를 위해 산 논을 사람들은 후에 ‘묘답(猫畓)’이라고 불렀다.
‘변고양이’로 불린 화가 변상벽 조선에서 고양이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
변상벽은 ‘변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고양이를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였는데,
우리나라 고미술사에서 고양이를 가장 많이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변상벽이 처음부터 고양이를 잘 그렸던 것은 아니다. 원래 산수화를 잘 그렸던 변상벽. 자신보다 산수화를 더 잘 그리는
화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이 잘 그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고양이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매일매일 반복해서 고양이를 그리다가 결국 고양이 그림의 대가가 된 것.
중국에서는 고양이의 묘(猫)가 70세 노인의 뜻인 모(耄)와 발음이 같고, 참새 작(雀)은 기쁨을 전하는 동물인 까치 작(鵲)과 소리가 같아 장수의 기쁨을 상징하는 의미로 그림 속에 종종 등장했다. 이런 그림들은 70세 생일을 맞는
노인들에게 선물하는 그림으로 주로 사용됐다.